NEW [기자의 관심] 기린과 麒麟兒 : 성과사회 속 청년들
- 2024-11-26
[기자의 관심] 기린과 麒麟兒 : 성과사회 속 청년들
대학은 종착역이 아니다. 많은 학생은 학생증을 손에 쥐고나서야 본인들이 통과한 관문이 그저 개찰구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르바이트, 학점, 자격증, 대외 활동… 끝나지 않는 역(驛)이다. 치열한 성과사회 속에서 오늘을 견뎌야 하는 경영대학 학우들에게, 소설 하나를 소개하겠다. 2003년 출판된 박민규(1968) 작가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이다.
주인공은 상업고등학교를 다니며 학업엔 좀처럼 관심 없는 학생이다. 어느 날 남루하기 짝이 없는 일터에서 버석한 얼굴로 사무를 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개심해 역사(驛舍)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주인공의 역할은 ‘푸쉬맨’ 이다. 푸쉬(push), 그러니까 열차를 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만원 전철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180명 정원에 400명의 사람이 타야만 하는 지옥 같은 전철에 매일 같이 사람을 욱여넣는다. 400명 분의 피로의 정동을 피부로 접하는 일은 주인공에게 강한 탈력감을 선사한다. 푸쉬맨의 일도 그러했지만, 주인공이 이 사회에 염증을 느낀 결정적 이유는 자신의 삶이 시급 1000원, 1500원을 셀 뿐인 단순 산수로 시작하고 끝나리란 사실을 알아차린 데에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산수(算數)를 한다. 어떤 산수는 복잡하지만, 또 어떤 산수는 보잘것없다. 어떤 이가 통장에 평생 요만한 숫자를 빼고 더할 때, 어떤 이의 가공할 규모의 자산은 제대로 된 수학(數學)을 필요로 한다. 현대인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사실이다. 가끔은 이 잔인한 명제 탓에 괴리를 느낀다. 2024년 최저시급은 9860원, 나의 산수는 9860원이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경영대학의 학생으로서 주로 배우는 것은 복잡한 수학식이다. ‘보잘것없는’ 쪽인 나의 것과는 너무 다르고, 나만이 9860원만이 반복되는 연산의 굴레에 매여 있다. 이 고민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며, 현 청년층을 통틀어 보편적이다.
대부분의 경영대 재학생들이 출간년도(2003)와 비슷한 해에 태어났을 것이다. 작품 배경인 2000년대의 상황은 지금과 당연하게도 다르다. 수도권 지하철 1호선~8호선은 폐선과 개통을 반복했으며, 9호선과 경의중앙선, 공항철도 등이 신설됐다. 서울 권역의 교통은 편리해졌고, ‘푸쉬맨’이라 이름 붙여진 90년대 계약직 일자리도 없어졌다. 최저시급도 당시엔 2510원이었다. 이마저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해, 주인공 실질적 산수는 고작 1000원에 불과했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9860원에 한탄하는 꼴이 우스워진다. 하지만 숫자의 단위가 슬픔의 크기일까? 그건 아니다. 현재가 반드시 과거의 발전형 모델인 것은 아니다. 사회는 모습을 바꾸는 만큼, 새로운 전장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마 이 시대의 피로사회를 이끄는 새로운 키워드는 ‘능력주의’ 이다.
흔히들 성공이란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의지’는 자유인가? 무엇을 하더라도 ‘갓생’, ‘망생’을 갈라 자신이 ‘참된 인간’임을 증명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규범이다. 성과사회의 보이지 않는 기준이며, 열차에 오를 이와 오르지 못한 이를 가르는 노란 경고선이다. 문제는 경고선의 하한이 물가만큼 가파르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넘어서지 못한 개체, 흔히 ‘아싸’, ‘히키코모리’, ‘인셀’, ‘백수’-혹은 인식조차 제대로 되지 못해 이름조차 없는 정상사회의 탈락자들은, 자연히 ‘비인간’으로 변모한다. 인간 중심적 시선에서 모든 동물 계층구조의 꼭대기는 항상 인간이다. 인간만이 동물종(種)으로의 발달을 마치고 사회적 발전을 시작했기에 그 숭고함을 인정받을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인간’의 기준이다. 철저히 성과사회를 위해 쓰인 기준을 소화하지 못한 사람은 그때부터 야만인이자, 동물로 분류된다.
문학계에서 비인간화는, 정상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타자화된 소외자를 표상하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속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그랬고,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속 주인공의 아버지가 그러했다. 소설의 클라이맥스, 주인공은 전철 플랫폼 안에서 기린을 발견한다. 기린의 정체는 얼마 전 실종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기어코 ‘비인간’으로 전락한 것이다. 전철역 속 기린, 생뚱맞은 모습이지만 바쁜 사회인들은 각기 자신의 신체를 갈무리하기 바빠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다.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떨리는 말을 건넨다. 앞으로의 희망찬 미래를 읊고, 자신이 아버지가 맞다고 얘기해줄 것을 읍소한다. 기린은 손을 포개며 답한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피로사회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한다.
흔히 재주가 뛰어난 젊은 사람을 두고 ‘전설의 동물’ 기린을 빗대어 기린아(麒麟兒)라고 한다. 여기서 기린(麒麟)은 성인이 세상에 태어날 징조이자 희망과 성공, 행복을 전해 준다는 중국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상서로움의 상징이다. 사슴의 형태를 가지며 피부에 오색 영롱한 비늘이 돋아 있는 모습에 사람들은 숭고함을 느낀다. 기린(Giraffe)은 어떤가, 점이 박힌 노란 피부와 피부로 덮인 뿔, 세상 어느 동물보다 높고 넓은 시야. 어느 쪽이든 기린이 특이한 동물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특이’는 현대 사회에선 통용되지 않는 가치이며, 흠결이다. 그런 모습을 두고 골계를 느끼는 사람은 있더라도 숭고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린(Giraffe)이 아닌, 기린아(麒麟兒)가 되고 싶은 욕망. 그것이 현대 사회이다. 사람들은 그를 위해 불특정 다수와 경쟁하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 매몰되어 스스로를 소진한다. 하지만 기린(麒麟)은 결국 전설의 동물이다. 각자도생 시대가 만든 환상이다.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기린아의 신화 속에서 고통받는 점박이 기린이다.
현대 사회는 그 자신이 기린이거나, 기린을 외면한 인간들로 가득하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출간 이후 20년이나 지났지만, 복잡한 수학 체계를 인생의 산수로 가진 이들의 세계는 공고하고, 단순 산수의 세계 역시 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몇 차례 경제 위기를 겪으며, 양극단의 첨도가 높아지기만 했다. 만약 우리가 기린으로 전락한 아버지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씁쓸함을 곱씹었다면, 그것은 출간 당시부터 지금까지 피로사회가 건재하다는 사실의 방증인 것이다.
기자 김희서(22)
BizOn Online Newsletter Vol.78 (2024.11.)